etc/신앙생활2017. 1. 3. 08:42
16.1.3(화3부,김문수전도사님)

'하나님은 그가 사랑하시는 이를 결코 혼자 내버려두지 않으십니다'

창세기39:1-5
1 요셉이 이끌려 애굽에 내려가매 바로의 신하 친위대장 애굽 사람 보디발이 그를 그리로 데려간 이스마엘 사람의 손에서 요셉을 사니라
2 여호와께서 요셉과 함께 하시므로 그가 형통한 자가 되어 그의 주인 애굽 사람의 집에 있으니
3 그의 주인이 여호와께서 그와 함께 하심을 보며 또 여호와께서 그의 범사에 형통하게 하심을 보았더라
4 요셉이 그의 주인에게 은혜를 입어 섬기매 그가 요셉을 가정총무로 삼고 자기의 소유를 다 그의 손에 위탁하니
5 그가 요셉에게 자기의 집과 그의 모든 소유물을 주관하게 한 때부터 여호와께서 요셉을 위하여 그 애굽 사람의 집에 복을 내리시므로 여호와의 복이 그의 집과 밭에 있는 모든 소유에 미친지라

할렐루야 ~
이렇게 이른 아침 주의 말씀을 사모하며 이 자리에 나오신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가운데 크신 은혜와 평강이 있기를 소망합니다
어느때보다 다사다난했던 2016년이 지나갔고 이제 17년을 맞이했습니다
여러분, 새로운 해를 어떻게 맞이하셨습니까?
이번에는 주일에 더 집중하기 위해 송구영신예배를 드리지 않았지만 대부분 교회에서 크리스천들이, 또 우리도 송구영신예배와 기도, 예배 가운데 경건한 마음으로 새해를 맞이하곤 했었습니다
하지만 여러분, 교회를 다니지 않고 믿음 없는 사람들은 새해를 맞이하는 방식이 우리의 그것과는 사뭇 다른 것 같습니다
어떤 이들은 일출을 보면서 소원을 빌기 위해 산과 바다를 찾는 사람도 있고요
또 한 해를 시작하면서 다짐하기 위해 여행을 떠나는 사람도 있습니다
그런가 하면 자신의 신년운수를 점치기 위해 철학관이나 점집을 찾는 사람도 있습니다
수능시즌과 더불어 점집이 가장 호황을 누리는 때라고 하더라고요
점집을 다녀온 집에 붙는 종이들이 있습니다
큰 글씨로 대문에 '만 사 형 통' 이렇게 써놓습니다
제가 전에 살던 집 맞은편 집도 꼭 새해가 되면 이렇게 부적과 같은 것을 현관에 붙이는 집이 있었습니다
가끔 집 앞에서 이웃과 마주치기라도 하면 저를 붙잡고 막 자랑을 하는 거예요
이게 되게 용한 집에서 해온 거라고 아주 비싸게 한 거라고 관심 있으면 얘기하라고 소개시켜주겠다고..
제가 갔을까요 안 갔을까요? ㅎㅎ
네 그렇습니다
그런데 이렇게 비싼 부적을 썼으면 참 선포한대로 가정이 만사형통하면 참 좋으련만 꼭 그렇지만은 않은 것 같더라고요
건너집이니까 소리가 들리는데 싸우는 소리, 사네 못사네, 물건 깨지는 소리, 이것이 형통인지 깡통인지 참.. 헷갈리는 것이죠
참 노력은 가상합니다만 헛된 것에 대한 잘못된 열심이고 잘못된 노력이더라는 것이죠
여러분, 우리는 허튼 힘 빼지 말고 바른 데 힘쓰는 우리가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부적을 쓰는데 들어가는 가격이 작게는 삼, 사만원 많게는 천만원을 호가하는 부적들이 있다고 합니다
제가 소개받아 써서 아는 건 아니고요 ㅎㅎ 인터넷으로 찾아봤습니다 ㅎㅎ
모르긴 몰라도 훨씬 더 비싼 부적도 있을 거라는 생각이 듭니다
요즘엔 검색을 하다 보니, 디지털 시대잖아요?
인터넷으로 신청하면 부적을 그려가지고 그림파일로 보내준다고 합니다
프린트를 하게 해주는 쓸데없이 편리한 시대가 되었습니다
그런가하면 인터넷 중고장에는 중고부적도 있더라고요
어떻게 설명해야될지 모르겠습니다
이처럼 많은 사람들이 다양한 방법을 통해서 자신의 인생이 형통하기를 기원하더라는 것이죠
그렇다면 모든 이들이 이처럼 원하는 형통, 과연 이 형통이란 무엇인가?
무엇을 가리켜 형통이라 하는가?
이시간 알아보길 소망합니다
사전적 의미의 '형통'이라는 것은 '모든 일이 뜻과 같이 잘 되어감'이라는 것을 뜻하는 명사입니다
사람들이 형통을 기원하는 제목을 살펴보면 '모든 일이 잘 되어 뜻과 같이 잘되어감'이라고 했는데 정작 사람들이 어떤 것을 보고 형통이라 하느냐 하면 돈 많이 버는 것, 시험에 합격하는 것, 자녀들이 좋은 데 취업하고 가정과 내 몸이 건강하면 그것을 가리켜 사람들이 형통이라고 한다는 것이죠
하지만 오늘 성경이 이야기하는 형통은 다릅니다
오늘 본문 말씀에는 성경이 형통하다고 증언한 한 사람이 등장합니다
그의 이름은 요셉입니다
요셉의 아버지는 우리가 잘 알고 있는 야곱입니다
그에게는 열두명의 아들과 한명의 딸이 있었는데 어떤 자식이 열손가락을 깨물어 안아픈 자녀가 있겠습니까?
모든 자녀가 내 자녀인데 미운 자녀가 있겠습니까?
야곱에게 요셉이라는 아들은 특별한 아들이었던 것입니다
요셉은 야곱이 말년에 자신이 가장 사랑했던 아내를 통해서, 라헬에게서 낳은 아들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러한 연유로 이 야곱이 요셉에게 특별한 애정을 보입니다
창세기 37장을 살펴보면 요셉을 대하는 야곱이 나타나는데 그에게 채색옷을 해 입히는 장면이 등장합니다
지금은 우리가 이렇게 색깔이 알록달록한 옷들을 구하기 어렵거나 하진 않습니다
하지만 그 당시만 해도 염색한 옷은 사치품이었기 때문에, 일반 사람들이 입을 수 없는 옷이었기 때문에 한 집안에 장자, 혹은 모든 사람들을 관장하는 감독, 이런 사람들이 자신의 신분이나 지위를 나타내기 위해 입었던 옷이 바로 이 채색옷이라는 것이죠
여러분, 요셉은 열한번째 아들이었습니다
아버지의 이런 편애, 그가 이런 것을 누릴 자격이 없음에도 누리게 되었는데 이런 편애를 형제들은 당연히 곱게 바라보지 않았다는 것이죠
그들의 마음이 불편했습니다
일이 이렇게 되었으면 조용히 있으면 되는데 또 이 요셉이 눈치가 없이 자기가 꿈을 꿨는데 곡식단이 자기에게 절을 하고 해와 달과 별이 자신에게 절을 했다면서 굳이 그렇게 불난집에 부채질을 하더라는 것이죠
그렇게 안아무인의 태도를 요셉이 보여줍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누구도 요셉을 건드릴 수 없었어요
요셉을 나서서 꾸중하는 이가 없었다는 것입니다
그정도로 그는 그 집에서 존귀한 위치에 있었습니다
아버지가 입혀준 채색옷이라는 권세가 있었고 장자의 대우를 받았기 때문에 아버지의 모든 소유가 요셉의 것이었습니다
부와 명예, 명성, 권력, 마치 세상에서 말하는 형통의 조건들을 요셉은 다 갖추고 있는 것 같습니다
하지만 성경은 그가 아버지 집에서 누렸던 모든 것들을 형통이라고 이야기 하고 있지 않습니다
오히려 이 모든 것들이 문제의 씨앗이 되는 것입니다
이러한 아버지의 편애가 곧 사건을, 요셉의 상황에 심각한 문제를 일으키게 되는데 아버지의 명을 받고 멀리 양치러 나간 형들을 만나러 갔다가 형들에게 잡혀 머나먼 이국땅에 팔려가게 되는 것입니다
결국 요셉은 미디안 상인들의 손에 이끌려 애굽으로 끌려갑니다
그리고 그곳에서 노예가 되어 왕의 시위대장 보디발의 집으로 팔려가게 되죠
오늘 읽은 본문은 바로 그 순간, 보디발의 집으로 팔려간 그때를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렇게 요셉은 그 집의 노예가 되었습니다
우리가 지금 살아가는 이 시대에는 노예제도가 없죠?
그래서 얼마나 노예생활이 힘든지 알지 못하지만 니체라는 독일의 철학자는 노예를 가리켜 정의하기를 '하루의 삼분의 이 이상을 자기 마음대로 사용하지 못하는 사람', '하루 열여섯시간 이상 자신의 마음이 아닌 타인에 의해 살아가는 사람'을 노예라고 표현하였습니다
미국의 흑인 노예들은 하루 평균 14시간에서 17시간 정도 사탕수수, 목화밭, 농장에서 강도 높은 노동을 감당해야 했습니다
우리도 일제강점기 때 비슷한 경험을 겪게 되었는데 강제징용 당해서 다녀오신 분들 증언을 들어보면 탄광으로 끌려간 분들이 오전 일곱시부터 저녁 일곱시까지 탄광 밖으로 나오지도 못하게 했다는 것이죠
가로 세로 일미터 남짓한 탄광에서 밖으로 나오지 못하고 일을 했다고 합니다
이러한 일을 미루어 봤을 때 노예생활이 얼마나 고달프고 비참했는지 미루어 짐작할 수 있습니다
아무리 틀 안에서 지위가 높아지고 자유가 주어진다 하더라도 노예는 어디까지나 노예 아니겠습니까?
한 집안에서 가장 큰 혜택을 누리던 존귀한 아들이 머나먼 이국땅에서 노예가 되어 있고 정작 자신의 가족들은 모두 이 아들이 죽었다고 여겨 찾을 생각도 하지 않고 있습니다
여러분이 생각하기에 요셉의 이 상황이 축복입니까 불행입니까?
그런데 이상하게도 성경은 요셉이 처해있는 상황을 형통이라고 표현하고 있습니다
삼십구정 2절 말씀에 보시면 '여호와께서 요셉과 함께 하시므로 그가 형통한 자가 되어' 그렇게 이야기 하고 있습니다
분명 우리 기준으로 봤을 때 요셉이 처한 상황은 형통한 상황이라고 이야기 할 수 없는 상황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성경은 그의 모습이 형통하다고 이야기 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형통이라 변역된 히브리어는 '번영하다' '성공하다' 그런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이 상황에서, 지금 이 노예가 된 요셉의 상황에서 형통이란 말을 적용하고자 한다면 감옥에서 바울을 풀어주신 것처럼 노예신분에서 해방되어 자유의 신분을 얻었다든지 보디발의 집에서 도망쳐나와 그리운 아버지 집으로 돌아갔다든지 그런 내용이 나와야 형통이라고 할 것 같은데 참 이상한 것 같습니다
그리도 다행인 것은 요셉이 일하는 것이 보디발의 마음에 쏙 들었다는 것이죠
그래서 가정 총무로 삼습니다
그리고 그에게 자신의 모든 재산을 위탁한다고 이야기하고 있는데요
위탁이라는 것은 '다 맡기고 자신은 신경쓰지 않는다'라는 것을 의미합니다
한나라의 왕을 지키는 시위대장의 재산이 얼마나 많았겠습니까?
그 재산을 아무 간섭 받지 않고 관리한다..
이 노예의 신분에서 이 정도면 조금은 형통이라는 단어와 어울리는 것도 같습니다
좀 꼬인 것 같지만 그가 처한 상황 가운데 조금은 나아진 것 같습니다
성경이 이야기한 것처럼 요셉의 인생이 조금은 형통해지는 것 같습니다
그렇게 신임을 얻은지 얼마 지나지 않아 이 요셉의 인생 가운데 또다른 어려움이 닥치게 된다라는 것이죠
바로 그 보디발의 아내가 요셉을 유혹하였고 거절한 요셉이 누명을 쓰고 감옥에 갇히는 사건이 발생합니다
'희망고문'이란 말 아십니까?
안되는데 될듯 될듯 하면서 계속 실패하는 어려움을 겪는 그런 것을 희망고문이라고 하는데 그 말이 떠오릅니다
조금 나아질만 하니까 꼬이는 것 같다가 조금 나자아질만 하니까 또다시 어려워지고 어려워지고
여러분, 요셉이 이집트에 파려갈 당시 나이가 열일곱살이었습니다
지금까지 아버지 집에서 왕자처럼 대우받다가 하루아침에 머나먼 이국땅의 노예로 팔려가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요셉은 속상하고 안타까운 상황이지만 희망을 놓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가정총무가 되었고요 이젠 조금 인생도 풀려가는 것 같습니다
그러나 한순간에 자신이 짓지도 않은 죄 때문에 억울한 누명을 쓰고 죄수의 신분으로 전락해버린 것입니다
여러분이 생각했을 때 이것의 형통입니까 불행입니까?
불행 중에서도 이만한 불행이 없어요
정말 큰 불행 가운데 처해진 것입니다
그런데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성경은 다시 한번 그 상황을 형통하다고 증언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읽은 본문 이십절에서 이십삼절에 나온 말씀입니다
20 이에 요셉의 주인이 그를 잡아 옥에 가두니 그 옥은 왕의 죄수를 가두는 곳이었더라 요셉이 옥에 갇혔으나
21 여호와께서 요셉과 함께 하시고 그에게 인자를 더하사 간수장에게 은혜를 받게 하시매
22 간수장이 옥중 죄수를 다 요셉의 손에 맡기므로 그 제반 사무를 요셉이 처리하고
23 간수장은 그의 손에 맡긴 것을 무엇이든지 살펴보지 아니하였으니 이는 여호와께서 요셉과 함께 하심이라 여호와께서 그를 범사에 형통하게 하셨더라
그렇게 이야기 하고 있습니다
세상에서 가장 억울하고 죄없는 사람들, 결백한 사람들만 모인 곳이 바로 교도소라 그러죠?
그곳에 가면 모두가 "나는 죄가 없는데 잡혀왔다" 이야기 하고 "억울하다" 하소연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자신이 죄를 짓고 들어온 사람들도 억울하다 하는데 하물며 정말 무죄한 사람이, 심지어 정의를 실현하기 위해 죄를 거부한 사람이 죄를 뒤집어쓰고 감옥에 들어갔을 때 그 심정이 어떻겠습니까?
그것은 분명 불행인데 말 할 수 없는 고통인데 또다시 성경은 요셉의 그 상황을 형통이라고 이야기하고 있는 것입니다
과연 이 상황에서 무엇이 형통이고 무엇이 잘 풀렸다는 이야기입니까?
여러분, 우리가 생각하는 형통의 모습과는 조금 다른 것 같지만 바로 여기에 요셉의 삶을 통한 하나님의 은혜가 숨어있는 것입니다
앞선 두 상황이, 노예로 팔려온 상황과 감옥에 갇힌 상황에서 형통하지 않은 가운데 형통하다고 하는 근거가 무엇인지 아십니까?
무엇이 불행의 순간마저 형통으로 만드는가?
그것은 바로 '여호와께서 그와 함께 하셨다'라는 것입니다
여러분, 하나님께서 함께 하신다는 것, 내가 어디에 있든지 내가 처한 환경이 어떠하든지, 내가 무슨 일을 당하고 어떤 어려움 앞에 있어도 하나님께서 나와 함께 하시면 나의 인생은 형통하다라는 것입니다
사드락과 메삭과 아벳느고는 타오르는 풀무불 가운데서 그의 인생이 형통한 것을 경험하였습니다
다니엘은 굶주리는 사자가 우글거리는 사자굴속에서 자신의 인생이 형통함을 발견하게 되었다는 것이죠
내가 돈을 얼마를 벌고 하고 있는 일이 얼마나 잘 풀려서 사회적인 지위가 높고 소원하는 바를 이룰지라도 그 인생에 하나님이 동행하지 않으시면 형통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것은 오히려 문제의 시작이 된다는 것이죠
하나님은 그가 사랑하시는 이를 결코 혼자 내버려두지 않으십니다
이것이 요셉이 머나먼 이국땅에 팔려와 노예가 되고 옥살이 하게 되었을 때도 형통하다 하는 비결이었다는 것입니다
다른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동행하셨더라'
'그렇기 때문에 요셉의 인생이 형통하였더라'
저는 이시간 소망하기를 이런 동일한 역사와 은혜가 우리에게도 있기를 소망합니다
우리 인생 가운데, 여러분 인생 가운데 하나님과 동행하시기를 소망합니다
그리고 하나님과 동행하시므로 여러분의 형통을 이루어가십시오
하나님께서 여러분을 도우실 것입니다
우리 시편 18편 말씀, 이렇게 귀한 말씀을 주셨는데 그렇습니다
1절 2절 말씀 보면
1 나의 힘이신 여호와여 내가 주를 사랑하나이다
2 여호와는 나의 반석이시요 나의 요새시요 나를 건지시는 이시요 나의 하나님이시요 내가 그 안에 피할 나의 바위시요 나의 방패시요 나의 구원의 뿔이시요 나의 산성이시로다
할렐루야 ~
하나님의 형통은 하나님께서 우리 인생 가운데 동행하시며 우리를 지키신다는 것입니다
여러분을 도우신다라는 것입니다
나의 반석, 나의 요새, 나의 피할 바위, 나의 방패, 뿔이시자 산성 되신 주님 안에서 늘 동행하시며 강건하고 형통을 이루어나가시는 여러분 되길 주님 이름으로 소망합니다
기도하겠습니다
Posted by GaePei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