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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tc/신앙생활2014. 9. 17. 11:19

9.13 newsong7
상한 심령으로 서라(수8:30-35, 시51:17)
김병규 목사님


추석 잘 보내셨습니까. 오늘 말씀은 두 곳의 말씀인데, 지난주는 믿음의 손을 내리지 말라는 주제로 여호수아 이야기를 했습니다. 아이성 전투에 실패한 이유 세가지. 그 말씀 전할 때 뒷부분 언급을 한 것이 8장 입니다. 아이성 전투에서 기도가 없었고, 말씀이 없었고, 아침에 일찍이 일어났다는 단어가 없었다. 그런데 다시 승리하고 나서 뒷마무리 한 내용이 이 말씀입니다. 패배와 승리를 통해 여호수아가 큰 깨달음을 얻었거든요. 그것을 백성들에게 다시 심어주기 위해 한 말씀입니다. 첫 번째는 여호수아가 다듬지 않은 돌을 가져다가 모세에게 주신 하나님의 말씀 그 율법을 다시 새겼다는 겁니다. 아주 뼈저리게 깨달았거든요. 말씀을 따르지 않는 것이 패배야. 승리와 패배는 하나님의 말씀에 달렸다는 것을 깨달았거든요. 율법이 있지만 다시 한 번 돌판에 새기는 작업을 한 것입니다. 다음에는 에발산과 그리심산으로 갑니다. 이틀거리인데 가서 그 가운데 하나님 말씀의 언약궤를 두고 하나님의 임재를 상징하죠, 그 앞에서 율법의 말씀을 백성들 앞에 낭독합니다. 우리 삶의 기준이 말씀이 되어야 한다는 것이죠. 그리심산은 나무가 많은 아름다운 산이고 에발산은 황량한 산입니다. 그리심 같은 삶은 풍성하고 축복받은 산, 에발산은 버림받은 삶이라면 그 기준은 말씀을 따르느냐 안 따르느냐. 그것을 백성들에게 알리기 위해 합니다.


그런데 그 말씀을 다시 새기는데 다듬지 않은 돌. 있는 그대로 가져 와서 그대로 새기라는 겁니다. 왜 그 귀한 율법의 말씀을 좀 다듬으면 좋지 않겠습니까. 그런데 소중한 말씀을 다듬지 않은 돌. 거칠고 울퉁불통한 돌에 그냥 새기라는 겁니다. 왜 그러셨을까요. 근데요 성경을 보면 그 상황이 특별해서 다듬지 않은 돌에 새기라고 하신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알려주신 법칙입니다. 출애굽기에 다듬은 돌로 재단을 쌓지 말라고 합니다. 돌로 쌓는데 다듬지 않은 돌로 쌓으라는 겁니다. 신명기에도 다듬지 않은 돌로 여호와의 재단을 쌓으라고 합니다. 반듯한 돌로 쌓으면 더 잘 쌓이고 모양도 잘 만들어지고 모양도 튼튼해 좋지 않겠습니까. 그런데 나에게 나아올 때는 다듬지 않은 그 모습 그대로 위에 예배 드리라는 겁니다.


핵심은 하나님은 우리의 중심을 보십니다. 겉모습이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거칠면 거친 모습 그대로 약한 모습 죄 된 모습 그대로 나아오길 원하지 겉 모습은 그럴듯한 모습으로 나아오길 원치 않으신다는 것입니다. 소제를 드릴 때도 마찬가지 입니다. 고운 가루 드릴 때도 그대로 드리라는 겁니다. 사람들 먹을 때는 거기 꿀을 넣는데 제사드릴 때는 꿀을 넣지 말라는 겁니다. 누룩 넣지 말고 딱딱한대로. 위장하고 부풀리지도 말고. 그 모습 그대로 내게 드리라는 거예요. 중심의 진실함을 원하시는 거예요. 바리새인과 세리가 기도할 때 바리새인이 저는 저 세리와 같지 않습니다. 금식을 하고 십일조를 드립니다. 감사합니다 찬양합니다. 하는 거예요. 세리는 멀리 서서 감히 눈을 들어 하늘을 쳐다보지도 못하고 가슴을 치며 하나님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 하고 기도했다는 거예요. 예수님이 저 세리의 기도를 하나님이 기쁘게 받으셨다 합니다. 바리새인의 기도는 겉으로 위장한 기도입니다.


오늘 말씀을 준비하며 우리 예배는 어떤가 생각했습니다. 여러 돌들로 이루어지지 않았습니까. 찬양시간, 기도 등. 잘 되기 위해 리허설도 합니다. 그런데 순서대로 잘 되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그 안에 진실함이 있는지. 하나님 앞에 다듬지 않은 모습으로 있는 모습 그대로 나오길 기뻐 받으실 줄 믿습니다. 여러분 드리는 기도와 찬양이. 그래서 찬양 시간에 돌아다녀 봤어요. 너무 예쁘고 좋아요. 기쁨으로. 감사함으로 이런 찬양이 나와 다 기뻐하고 즐거워하고. 울면서 부르라는게 아니예요. 우리가 부르는 찬양 가운데 진실함이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그 예배를 기쁘게 받으십니다.


제가 나누고 싶은 말씀은 있는 모습 그대로 드린다는 것이 어떤 것인지. 그래서 제목을 상한 심령으로 서라고 지었습니다. 하나님이 받으시는 예배. 있는 모습 그대로 나아갈 때 받으신다는 것을 절실히 경험한 사람이 다윗입니다. 시편 51편은 다윗이 그것을 절실히 깨닫고 내린 결론입니다. 다윗이 시편 51편에서 쭉 이야기 합니다. 밧세바와 동침한 후 선지자 나단이 왔을 때 입니다. 왕이 되고 전쟁에 승리하고 평안해졌을 때 이제 좀 풀어졌는지 전쟁에 나가지 않고 옥상을 거닙니다. 그러다 밧세바를 보고 음욕을 품고 간음을 합니다. 그런데 임신을 했다는 연락이 온거예요. 그런데 또 숨깁니다. 전쟁터에 나가있는 남편을 불러 특별 휴가를 주고 아내랑 즐겁게 보내다 가라 합니다. 그런데 충직한 사람이라 집에 가지 않는거예요. 그래서 다윗이 작전을 바꾸어 전쟁 중에 가장 치열한 전방으로 보내 결국 죽게 만듭니다. 완전 범죄가 된거죠. 시간이 흐르게 됩니다. 최소한 1년 정도. 아이도 태어납니다.
어느날 나단선지자가 찾아옵니다. 제가 보고할 것이 있습니다. 한 부자가 있는데 많은 양도 있고 소도 있는데 같은 성의 가난한 사람은 암양 새끼 한 마리만 애지중지 키웁니다. 어느날 부자집에 손님이 찾아와서 접대하는데 자기 양이 아까우니 가난한 사람의 한 마리 밖에 없는 양을 잡아 접대했다는 거예요. 다윗이 화를 냅니다. 그 사람은 죽어도 싸다고. 그랬더니 나단이 차분하게 대답하는 것이죠. 왕이시여 당신이 바로 그 사람입니다. 그 한 마디에 다윗이 깨닫습니다. 다윗이 그렇게 아무도 모른다고 생각한 죄가 드러나게 되면서 깨어집니다. 그리고 다윗답게 고백하는 것이죠. 맞습니다. 내가 여호와꼐 범죄했습니다. 고백하고 하나님께 나아가서 고백한 것이 이 시편 51편입니다.


다윗은 죄를 지었습니다. 그리고 그 때 우리랑 같이 감추려 합니다. 은폐하기 위해 더 큰 죄를 짓고. 성공한 것 처럼 보였습니다. 뭐라는 사람도 없고 밧세바를 아내로 삼아 행복하게 사는 것 같아 보였습니다. 똑같이 찬양도 했을지 모릅니다. 그치만 행복하진 않았습니다. 다른 사람은 몰라도 본인은 알았습니다. 하나님이 내 찬양을 안 받으신다고 나옵니다. 그걸 경험해보지 못한 사람은 몰라도 하나님이 흠향하시는 예배를 드렸던 사람이 하나님이 받지 않는 예배를 드리는 마음이 얼마나 답답한지 본인은 알 겁니다. 그렇게 한 1년 정도를 살았거든요. 어느날 나단이 찾아와 자기 부끄러운 모습이 드러나게 되었고 너무 아프고 초라해졌지만 다윗은 어쩌면 그 때가 가장 행복했을 겁니다. 비로소 하나님 앞에 깨지고 통회하는 마음으로 나아가게 되었고 다시 하나님이 받으시는 예배자로 서게 되었다는 것이 이 내용입니다. 51편에서 막 기도하는 것이 내가 범죄했으니 용서해주시고 씻어달라는. 왜 이런 죄를 지었을까 생각해보니 내가 모태에서부터 죄인이라고. 잉태할 때 부터 죄인. 존재 자체가 죄인인 것을 꺠닫고 용서해달라고. 주 앞에 쫓아내지 말아달라 기도합니다. 답답하니까 더 많이 예배드리고 찬양하고 제물 드렸을지도 몰라요. 그러나 제사를 기뻐하지 않으시니 그럼 번제를 드렸을지도 모른다. 하나님께서 구하시는 것은 상한 심령이다.


그런데요. 상한 심령이 뭡니까. 의외로 성경이 아니라 만화를 통해 깨달았습니다. 슈렉 아시죠. 그 배경 음악 가운데 할렐루야라는 노래가 있습니다. 이 장면 한 번 보시죠.


(영화 슈렉 중 웨인라이트가 리메이크한 'Hallelujah')


어때요. 뭔가 좀 어색하죠. 다윗이 작곡한 할렐루야는 차갑게 깨진 할렐루야. 이 노래를 broken hallelujah라고 하거든요. 해석이 잘 안 되는데요. 계속 보고 또 보면서 여러 사람이 쓴 글을 보면서 포기했어요. 보통 이 가사를 이중적인 의미가 있다고 합니다. 다윗이 작곡하고 부른 할렐루야인데 broken hallelujah라는 거예요. 원래 다윗은 법궤 옮기며 옷이 벗져지는지 모르면서 막 부른 할렐루야잖아요. 그런데 삼손 머리가 잘린 것 처럼 하나님의 사람으로서 힘을 잃고 의자에 묶인 것 처럼 꼼짝도 못하고 있는 거예요. 그렇지만 다윗은 1년동안 예배를 드렸어요. 이런 가사가 있습니다. 아마도 신이 하늘에 계실 수도 있겠지 그렇지만 사람들에게 배운 것은 당신을 능가하는 사람을 쏴 죽이는 거야. 세상이 가르쳐주는 성공이잖아요. 남이 어떻게 되든 원하는 것을 얻어라. 그것은 깨어진 할렐루야 입니다. 다 얻은 것 같지만 지금 부르는 할렐루야는 하나님이 받지 않으시는, 겉보긴 다듬은 돌처럼 그럴듯 할지 모르지만 그 할렐루야는 차갑고 깨진 받지 않으시는 할렐루야.


두 번째 의미는, 제 생각엔 이 의미 같은데 모든 것이 잘못되어버렸지만 그래도 오직 할렐루야만을 부를 수 밖에 없다. 내가 실패했지만 죄를 지었지만 그래도 하나님을 사랑하고. 상한 심령일 지 모르지만 그것을 부르겠다. 하나님께서는 기쁘게 받으셨다. 깨어진 할렐루야가 뭘까. 나오지 않지만 시편 51편이예요. 하나님 앞에서 다윗이 상한 통회하는 심령으로 부른 할렐루야. 이전에 법궤 앞에서 즐겁게 춤추며 부른 할렐루야가 아니라 깨진 상처를 갖고 부끄러운 마음으로 부른 시편 51편 이예요. 막 하나님을 찬양하고 바리새인처럼 얼마든지 그럴 수 있어요. 처음 1년은 그랬을수도 있겠죠. 그런데 받지 않으십니다. 두번째 부른 깨어진 할렐루야는 기쁘게 받아주셨습니다.


저는 말씀 준비하며 자신에게 물어봤습니다. 내가 전하고자 하는 말씀은 어떤 할렐루야인지. 저는 첫번째 할렐루야였던 거 같아요. 이번주 말씀 준비하는 것이 유난히 힘들었습니다. 이것 저것 찾아봐도 모르겠어요. 그럴듯해보이지만 내게 주신 감동 그대로가 아니더라구요. 그래서 제가 다 포기했습니다. 다 포기하고 주시는 대로 말씀 전하겠다. 여러분들이 드리는 예배는 어떤 할렐루야 입니까. 그럴듯해 보이고. 여러분의 삶은 어떤 삶입니까. 사람들보기엔 성공적일지 모르지만 여러분의 중심이 드려지지 않으면 받지 않으십니다. 그대로 하나님 앞에 나아가야 합니다. 상한 심령으로 나아가야 합니다. 그것이 뭡니까.


첫 번째는요 자기의 죄를 하나님 앞에서 인정하고 고백하는 것. 하나님 앞에 나아갈 때 오늘 예배를 드릴 때 상한 심령으로 예배 드리길 원합니다. 오늘 설교는 나하고 상관 없어. 정말 그러기를 바래요. 하나님 앞에 온전한 모습으로 드리는 예배이길 원하지만 저는 당신이 바로 그 사람입니다 하는 말이 바로 여러분에게 하시는 말씀이예요. 당신이 다윗입니다. 그럴듯하게 앉아있을지 모르지만 다윗처럼 참회하고 통곡하는 모습으로 나아가야 할 사람이 당신입니다. 인정하고 나아가는 것이 상한 심령으로 나아가는 것인 줄 믿습니다. 어떻게 그럴 수 있었느냐. 하나님의 말씀 앞에 섰거든요. 사실 하나님이 다윗에게 많이 말씀하셨을겁니다. 계속 못 들은 척 하다가 나단을 통해 세게 말씀하시니 받아들입니다. 네가 그 죄인이다. 그 말 앞에 자신을 돌아봅니다. 여러분도 계속 말씀을 듣지만 관심 없는 거죠. 나를 딱 비춰봐야 하는데 자길 돌아보지 않고 귀를 닫는거죠. 말씀 앞에 여러분 모습을 살펴보십시오.


제가 보통 전날에 아내랑 설교 준비한 것을 나누는데 할 말이 없어요. 전에 김하나 목사님이 자랑하셨는데 저도 비싼 만보기를 장만했습니다. 체크해봤더니 만보가 안 되서 그거 채우고 온다고. 아내가 같이 있음 준비가 안 될 것 같아서 혼자 나갔어요. 그리고 제 모습을 돌아봤습니다. 추석 연휴 보내면서 정신없이 부끄러운 모습으로. 하나 하나 보이기 시작하는데 너무 부끄러워서 만보 채우려다가 어딘가 가서 기도하고 싶었어요. 회개하고 싶어서 교회를 찾았어요. 십자가가 너무 많은데 한 군덴 문이 닫혀있어 또 갔어요. 거기도 닫혀있어요. 그러다가 포기하고 십자가 계속 보면서 걸어다녔어요. 3100보인가 걸었는데 제 마음 가운데 너무 부끄러워서 하나님 죄송합니다 기도하고 싶어서 그렇게 걸었는데 교회가 저희 집 주변에 13개가 있더라구요. 저희 집 바로 앞에 교회가 있는지도 몰랐는데. 하나씩 볼 때 마다 마음이 점점 무거웠어요. 정말 많구나. 제법 규모가 있는 교회도 있고 작아서 들어가보니 문 다 잠겨있는데 지하에 조그만 교회. 써있긴 금요일 저녁 철야가 있다는데 기도 소리는 안 들리고. 마음이 너무 무거웠어요. 이렇게 교회가 많은데 내가 교회를 또 해야 하나. 이렇게 교회가 많은데 이 지역에서 다 빛으로 소금으로 하나님 종으로 살겠다고 교회 세우셨을텐데 이 지역이 얼마나 영향력 아래 있는가 안타까웠구요. 아내랑도 와서 그런 이야기를 했어요. 우리는 어떻게 살까. 그런 마음이 들었어요.


그 분들 다. 어떤 상황인지 모르지만 그 분들이 그런 마음으로 했겠지만 지금 얼마나 많은 교회가 있습니까. 그런데 한국 교회가 힘이 없고 욕만 먹는 이유는 뭘까. 교회를 통해 하나님이 능력이 나타나야 하는데 안 나타나는 이유가 뭘까. 하나님의 영이 함께 하시겠죠 그렇지만. 하나님의 영이 함께 하시는 것은 두 가지 인데 하나는 영이 함꼐 하는 것은 영이 나를 지배하는 겁니다. 성령의 소욕이 나를 지배하는 겁니다. 또 한가지는 육체의 소욕도 나를 지배하는겁니다. 그럴 때는 성령님이 역사하지 못하고 탄식하고 기도하고 계십니다. 그래서 두려움이 생겼습니다. 저는 다윗이 한 고백이 제 고백 같아요. 제가 나중에 목회 했는데 능력도 없고 그런 목사가 되면 어떡하나. 하나님이 나에게서 떠나시면 어떡하나. 내가 이렇게 겉만 그럴듯하게 살다가 다윗이 두려워한 것 처럼 나를 주 앞에서 쫓아내지 마시고 성령을 거두지 마옵소서. 이 말씀이 너무 두려웠어요.


하나님이 나를 쫓아내시면 내 인생이 무슨 의미가 있나. 만약 여러분이 성공해요. 그런데 하나님이 여러분을 떠나요. 그럼 그 인생이 얼마나 비참한지 하나님을 경험해보지 않은 사람은 모를거예요. 상한 심령으로 나간다는 것은 첫 번째는 말씀의 거울 앞에 비춰서 나의 죄를 하나님께 고백하는 겁니다. 하나 하나 바취보십시오. 그 사람이 바로 당신입니다.


두번째는 자기 죄를 고백하며 하나님께 용서를 구하고 하나님의 구원의 기쁨이 회복되길 원했습니다. 겸손히 구하십시오. 어떤 학자는 상한 심령은 무능력해진 마음, 꺾여진 뼈라고 번역하기도 합니다. 51장 8절 보면 주께서 꺾으신 뼈들도 즐거워하게 하소서. 그게 상한 심령입니다. 아무것도 못 하고 오직 하나님만 바라보고. 야곱도 환도뼈가 부러졌을때가 있었잖아요. 야곱처럼 하나님 나를 축복하지 않으면 나는 살 수가 없습니다. 내게 성령을 거두지 말라고 겸손히 기도하며 나아가는 사람이 상한 심령으로 나아가는 사람인 줄 믿습니다. 그 떄에 구원의 기쁨을 회복시키고 다시 한 번 자원하는 마음 주시고 주님꼐서 기뻐 받으시는 의로운 예배 될 줄 믿습니다.


말씀 마치겠습니다. 하나님 앞에 여러분들 많이 예배 드리잖아요. 어떤 모습으로 섰습니까. 다윗처럼 상한 심령으로 서길 원합니다. 바로왕은 계속 말씀을 들었지만 자기 모습을 보지 않았습니다. 가인도 마찬가지 입니다. 상한 심령으로 나가지 않고 계속 피하려고만. 아담도 마찬가지 입니다. 핑계만 댑니다. 저와 여러분이 다윗, 사도 바울의 길을 걷길 원합니다. 상한 심령으로 나아갈 때 온전한 예배자로 다시 세워주실 줄 믿습니다.

Posted by GaePein
etc/신앙생활2014. 9. 17. 11:18

9.17일(수) 새벽예배 • 갈라디아서 2:20 오늘 본문을 보면 내가 사는 것이 아니오 내 안에 계신 그리스도께서 사는 것이라고 바울은 소개합니다 그리스도께서 사는 삶이 무엇인지에 대한 설명도 나옵니다 그 삶은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입니다 주님을 믿는 믿음으로 사는 것이 곧 그리스도께서 사는 것이고 내가 사는 것과는 다른 삶임을 알려주는 것입니다 바울은 이 내용을 편지에 쓸 때에 본인이 가지고 있는 무한한 신학적인 지식을 바탕으로 기록한것이 아니고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신다고 말할 때 순전히 자신의 삶의 체험에서 나온 고백을 기록하고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들도 그러한 삶을 살도록 권면하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잘 아는 것처럼 바울은 비방자요 박해자요 폭행자라고 스스로 고백합니다 비방자라는 단어는 거룩하신 자를 마치 거룩하지 않은 자처럼 말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거룩한 분인데 마치 거룩하지 않은 분처럼 말하는 뜻을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바울은 하나님을 대항했던 사람이었습니다 박해라는 단어는 쫓아가다라는 뜻이 있습니다 바울이 성도들을 핍박할 때 끝까지 쫓아가서 박해했던 지독한 사람이었습니다 우리가 흔히 원수를 품어서 이세상 끝까지 쫓아가겠다라고 얘기를 하지 않습니까? 바울이 이처럼 지독했던 사람이었습니다 폭행하다라는 뜻을 살펴보면 악한 감정을 가지고 사람의 인권을 유린하다는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바울이 이렇게 비방자, 박해자, 폭행자로써 잔인하게 핍박하던 사람이라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또한 죄인중에 괴수라고 고백합니다 괴수라는 뜻은 이 세상에 악한 사람을 다 모아서 악한 순서로 줄을 세웠을 때 제일 앞에 있는 사람을 의미합니다 바울 스스로 이렇게 고백하는 것입니다 나는 비방자요, 박해자요, 폭행자로써 죄인의 괴수였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바울의 죄인의 괴수된 모습이 사도바울 7,8장에 다 나옵니다 스데반 집사님이 돌로 맞을 때 학자들은 이 사건의 핵심적인 인물이 바울이었을 것이라고 얘기합니다 또한 사도바울 8장 3절에 보면 바울이 교회를 잔멸하고 믿는 사람을 끌어다가 옥에 가두웠다고 나옵니다 잔멸이라는 말은 주로 야생동물을 표현할 때 사용됩니다 먹이를 잡아서 다 뜯어먹는다는 뜻입니다 바울은 마치 야생동물이 잡아먹는 것처럼 믿는 성도들을 다 끌어다가 잡은 것입니다 여러분 바울을 보십시오 바울이 교회와 하나님에 대해서 가지고 있던 태도가 비방자, 폭행, 괴수, 잔멸, 위협 등 이런 단어들은 듣기만 해도 치가 떨리고 무서운 단어입니다 바울이 그러한 인물이었습니다 여러분 바울에게 제2의 인생이 있겠습니까? 이런 바울에게 새로운 삶의 기회가 요만큼이라도 주어질 수 있겠습니까? 그러나 우리가 잘 아는 것처럼 사도행전 9장 이후의 삶은 전혀 다른 삶을 살게 됩니다 신약 성경에는 바울이 쓴 13개의 서신이 있습니다 이 13개의 바울의 서신 중에 데실로니가 전후서, 빌레몬서를 제외한 10개의 편지를 읽어보면 맨 처음에 나는 예수그리도의 종이요 사도라는 표현이 빠짐없이 나옵니다 그래서 우리가 사도행전을 읽은 다음에 서신서로 넘어가면 바울이 언제 그랬냐는 듯이 비방자, 폭행자의 모습은 사라지고 예수님의 종인 이러한 바울의 모습을 만나게 되는 것입니다 갈라디아서 2:20절을 보면 예수그리스도를 만난 심정을 표현합니다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오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는 것이라고 합니다 내가 누구입니까? 비방자요 폭행자요 죄인중에 괴수였는데 십자가에 못 박히고 나니 이제는 내안에 그리스도께서 사는 인생이 되었습니다 십자가에 권세가 있고 능력이 있고 은혜가 있는 줄 믿습니다 그 누구도 십자가에 못 박히신 은혜 없이는 변화된 삶을 살 수 없습니다 골고다 언덕의 십자가가 새로운 인생의 시작점인 것입니다 바울은 십자가에 못 박히고 나니 은혜 안의 삶을 살게 되었습니다 바울은 육신의 생각으로 살아가던 사람이었는데 십자가에 못 박히고 나니 성령의 생각을 하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바울은 옛 사람이었으나 십자가에 못 박히고 나니 거룩함을 지으심을 받은 새 사람으로 지으심을 받게 되었습니다 우리가 아무리 애를 쓰고 몸부림을 쳐도 절대로 법 아래에서 벗어날 수 없습니다 오직 십자가 만이 법 아래에서 벗어나고 은혜안에서 살 수 있는 것입니다 십자가에 못 박힌 이후에야만이 육신의 생각을 벗어나고 성령의 생각에 따라 살아갈 수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십자가 앞에 나아가서 철저히 참회하고 나를 불쌍히 여겨주소서 나를 용서하여 주소서 하고 철저히 회개하고 통곡하고 눈물을 흘려야합니다 십자가에 못 박히는 경험이 있어야 우리의 삶이 비방자, 폭행자의 삶을 벗어나서 새로운 삶을 살아갈 수 있는 것입니다 십자가에 못 박히고 나면 정죄함이 없는 것입니다 바울은 로마서 8장에 이르기를 우리가 십자가에 못박힌 이후에는 정죄함이 없고 하나님이 우리를 의롭다 하시는 것입니다 과거에 우리의 잘못이 절대로 우리의 삶의 발목을 잡는 일이 없는 것입니다 누가 바울을 고발한다고 생각해 보십시오 저 바울은 비방자요 폭행자요 죄인중에 괴수였습니다 교회를 잔멸했습니다 속지 마십시오 주님은 이렇게 대답하셨을 것입니다 바울을 고발하는 너는 누구냐? 그는 예수의 피로 씻음을 받았기 때문이다 우리에게도 동일합니다 누구도 우리를 고발 할 수없고 과거에서 해방되어 새로운 인생을 살아갈 수 있는 것입니다 이 아침 모두에게 십자가에 나오는 치유와 위로가 있기를 바랍니다 십자가에 못 박혀서 이제는 내 안에 내가 사는 것이 아닌 그리스도와 함께 살아가는 모두가 되기를 바랍니다 기도하겠습니다 새벽을 깨웁시다^^

Posted by GaePei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