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tc/신앙생활2014. 10. 20. 16:49

10.18 newsong7
너희도 행하게 하려 하여(요13:1-15)
박은성 목사님


1875년 루터교 목사의 아들로 태어나서 철학박사, 신학박사 학위를 받고 20대에 이미 세계적인 인물로 인정받은 사람이 있습니다. 바흐 연구자 이자 파이프 오르간 기술자로 활동했습니다. 그 후에는 의학박사가 됩니다. 지금의 가봉으로 떠나게 됩니다. 여러분이 아시는 알버트 슈바이쳐라는 인물입니다. 아내와 병원을 운영합니다. 처음엔 자비로 나중엔 기부금으로 유지하였습니다. 그가 4년만 더 일찍 태어났으면 프랑스인이었을 텐데 4년 후에 태어나서 그 곳이 독일이 되었다는 것이고, 프랑스인의 적국인 독일인이라는 이유로 프랑스에 억류되기도 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가봉으로 돌아가서 병원 터를 잡고 나병 환자를 위한 거주지도 채우게 됩니다. 그의 희생이 인정받아 노벨 평화상을 받게 됩니다.


저는 어린 시절 가정 예배를 드렸습니다. 여러분 가정에서 예배를 드리는 것이 참 귀한 일입니다. 사도신경, 말씀 1장, 기도. 돌아가면서 기도를 하게 됩니다. 꽤 무거운 부담감을 느낀 기도 시간이었습니다. 가장 기억에 남는 것이 하나님 저도 슈바이쳐 박사처럼 내가 가지고 있는 것들을 두고 가난하고 힘든 사람들을 위해 일하게 해 주세요. 글을 읽게되면서부터 꽤나 오랫동안 지속되었던 기도였던 것 같습니다. 과연 그렇게 될 수 있을까에 대한 도전은 아직 남아있는 것 같습니다.


한번 슈바이쳐가 자금을 구하기 위해 독일로 돌아갔습니다. 고향사람들이 환영을 위해 기다렸는데 열차가 오고 한참을 지나도 나오지 않았습니다. 3등석에서 내렸습니다. 왜 그랬냐 물으니 이 열차에는 4등칸이 없어서 3등칸에서 왔습니다. 더 낮은 자리가 없어서 아쉬워했다는 것입니다. 나는 이 자리를 두고 더 낮은 자리로 갈 수 있을까. 제 자신에게 던지는 질문 중 하나입니다.


오늘 본문 13장 말씀은 요한복음 후반부 입니다. 1장에서 12장 까지가 전반부 이고 이후가 후반부 입니다. 전반부는 표적의 책이라고 부르는데, 7가지 중요한 표적이 나옵니다. 물로 포도주를, 신하의 아들을 고치시고, 38년된 병자를 고치시고, 5천명을 먹이시고, 물 위를 걸으시고, 나면서 부터 소경된 병자를 고치시고, 나사로를 살리시는 표적입니다. 예를 들면 인간의 한계, 자연 만물이 가지는 한계선을 예수님의 능력으로 넘어섰다는 것을 보여주는데, 물이 포도주가 되는 것은 질적인 변화입니다. 신하의 아들을 고치신 것은 공간을 초월한 능력입니다. 그 자리에 계시지 않아도. 38년된 병자는 시간, 오랜 세월을 넘어서는 하나님의 능력. 5000명을 먹이시는 것은 양을 초월한 하나님의 능력을 보여줍니다. 물 위를 걸으심은 자연 법칙을 넘으시는 하나님의 능력, 소경을 고치신 것은 운명을 극복하게 하시는 하나님. 마지막으로 나사로를 통해 죽음까지 넘어서는 하나님의 능력을 보여줍니다.


그런데 사람들이 표적을 보았을때 가진 오해가 있습니다. 단순히 하나님이 대단한 분이시구나 하고 그쳤다는 것이죠. 사실 목적은 인생을 얼마나 사랑하는가를 보여주고 싶으셨던 것이죠. 최종 목적은 사랑이었는데, 제자들과 사람들은 몰랐어요, 그저 5천명을 먹이실 때 그저 먹기 위해 따라갔다는 것이죠.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그저 밥을 먹이는 사람으로 보는 그 심령의 궁핍함을 보고 눈물을 흘리십니다. 계속해서 깨닫지 못했습니다.


반면 13장을 기점으로 영광의 책이라고 합니다. 십자가 사건을 통해 하나님이 받으실 영광에 대한 내용입니다. 공관복음은 오래 전 예언된 예수님께서 정한 곳에서 정한 곳에 나셨다는 것에 초점을 맞춥니다. 그러나 요한복음은 태초에 계셨던 예수님, 말씀이 육신을 입고 이 땅에 오심을 말합니다. 그래서 단순히 예수님의 죽으심은 고난의 결과가 아닌 하늘에서 오신 하나님이 다시 하늘로 올라가심입니다. 이 땅에 오셨다 다시 올라가신 그 영광된 과정을 말하는 것이 요한복음 뒷부분의 핵심입니다. 예수님께서는 하늘로 올라가는 영광의 때를 맞으셨습니다. 공관복음에서 말하는 때는 예수님께서 사역을 시작하셨을 때를 말합니다. 그러나 요한복음은 이제 영광스럽게 될 그 때를 말하고 있습니다.


당신이 영광을 받으실 때에 주님께서 끝까지 사람을 사랑하기로 하셨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요한복음의 후반부를 여는 말씀이, 끝장까지 이어지는 주제가 됩니다. 예수님께서 사람을 어떻게 끝까지 사랑하시는가 입니다. 17장까지 계속되는 설교, 그 후의 수난과 부활도 끝까지 사랑에 대한 이야기 입니다. 마지막으로 베드로에게 디베랴 바닷가에 찾아가신 예수님은 회복시키시고 끝까지 사랑을 요구하시는 것입니다. 그리고 주님께서는 그 사랑을 보이시고자 제자들과 고별만찬을 준비하셨습니다.
주님의 식탁은 화려하지 않습니다. 그저 일용할 양식인 빵과 포도주 입니다. 교회 안에서 무얼 먹는가 그리 중요하지 않습니다. 함께 그 음식을 떼고 나누고 삶과 이야기를 나누는 것이 더 중요합니다.


작년 제가 처음 청년부 왔을 떄 간식에 대한 고민, 그룹장으로서 간식에 대한 고민을 들었습니다. 신앙 공동체에서 무엇을 먹느냐는 그리 중요하지 않습니다. 같이 떡을 떼고 말씀 나누는 것이 더 중요하다고 답한 적이 있습니다. 나누는 것 자체가 은혜가 있었던 것이죠. 제자들은 낡은 다락방에 모이게 되었습니다. 영광받으실 때가 되었는데 오히려 낮아지시기로 합니다. 나의 능력을 드러내서가 아니라 낮추시고 아래로 그래서 십자가까지 낮아지심을 통해 예수님의 마음을 뜻을 가르치길 원하셨던 것입니다. 사람으로부터 배반 당함을 아시면서 끝까지 긍휼을 베푸셨던 것입니다.


누가복음보면 그런데 제자들은 누가 더 크냐는 다툼이 있는 것을 보게 됩니다. 이제 선생님이 예루살렘으로 가서 세상을 뒤엎고 영광을 얻으시면 누가 더 많이 받게 될 것인가. 그 전에도 다투었고 예수님께서 답을 주셨습니다. 그러나 그 마지막 자리에 와서도 다투었습니다. 잔치의 윗 자리 회당의 높은 자리를 좋아하지 말라. 큰 자는 섬기는 자가 되어야 하리라. 자기를 낮추는 자는 높아지리라 거듭 가르쳐 주셨습니다. 예수님께 자리를 청탁하는 야고보와 요한에게 제자들이 분노하는 것을 보시고 너희 중에는 누구든지 크고자 하는 자는 섬기는 자가 되고 으뜸이 되려는 자는 모든 사람의 종이 되어야 할 것이니라. 풀어드리면, 로마사람들, 다스리는 사람들은 그들의 능력으로 다른 사람들을 부려먹는 것을 알지. 그런데 너흰 그러지 말아야 한다. 정말 큰 사람이 되려면 섬기는 사람이 되어라. 모든 사람의 종이 되어라. 차라리 섬기는 사람이 되어라. 주님께서 가르쳐 주셨습니다. 남보다 조금 더 높아보이려는 불화가 그 식탁자리를 덮고 있었지만 오히려 주님께서는 섬기는 자가 되라고 하십니다. 그리고 물을 떠오셔서 방금 전 다투었던 그들의 발을 씻기십니다.


성지순례 가보니 정말 너무나 많은 먼지가 날리고 물을 항상 사먹어야 합니다. 석회가 너무 많아서 금새 옷이 더러워지고 발이 더러워집니다. 비가 정말로 안 오는데 이른 비와 늦은 비가 온다고 하잖아요. 늦은 비는 딱 한번 오고 맙니다. 이른 비가 10월 11월 쯤 딱 한 번 오면 땅이 부드러워서 씨앗을 심기 좋습니다. 그리고 비가 안 오다가 3월 쯤 늦은 비가 내리면 수확을 합니다. 늦은 비가 온다고 하니 아무도 우산을 안 쓰더라구요. 축제입니다. 그 땅은 너무나 메말라서 항상 발이 더러울 수 밖에 없는 악취가 나는 땅입니다. 그래서 집 들어오기 전에 늘 물동을 놓고 발을 씻었습니다. 자기 발을 자기가 씻고 들어가는데 노예를 부리는 사람은 노예나 종이 씻겨줬습니다.


누가 더 높아질 수 있을까 다투는 분위기 가운데 당연히 옆에 있는 사람 발을 씻어줄 수 없겠죠. 그래서 예수님께서 먼저 대야에 물을 떠오시고 겉옷을 벗으시고 수건을 두르십니다. 수건을 두른다는 말은 일을 하고있다는 뜻입니다. 영광받으실 예수님께서 마지막 때에 가슴에 금띠를 두른다고 합니다. 이 땅에서는 그 분이 허리에 수건을 두르신다는 겁니다. 끝까지의 사랑은 허리에 수건을 두르는 것에서 시작됩니다. 사랑을 위해 일하는 것. 사랑은 예수님께서 하신 사랑은 수건을 허리에 동이는 것입니다. 우리가 수건을 허리에 두를 때에 금띠는 마지막 때에 하나님께서 그 영광의 때에 우리에게 허락하실 줄 믿습니다. 앉아서 먹는 자와 섬기는 자 중 누가 크냐. 그러나 나는 섬기는 자 중에 있느니라. 세상에선 앉아있는 자가 더 높고 대단해 보이지만 나는 내려앉는 섬기는 자로 너희 중에 있느니라. 사람들은 더 좋은 식탁으로 갈 때에 예수님은 다락방으로 가셨습니다. 앉아서 먹으려 할 때 내려 앉아 발을 씻기기 시작하십니다.


천재라 불리던 소년이 있었습니다. 승승장구하는 삶이었습니다. 많은 기대를 주고 실제로 하버드의 교수가 되었습니다. 존경받던 신학자였고 쓰는 책 마다 베스트셀러, 수 많은 사람이 그를 만나기 위해 나왔습니다. 그러나 어느날 하버드 교수를 그만두고 복지시설의 말단 직원으로 일하기 시작합니다. 사람들이 물었습니다. 용변을 치우고 식사를 돕고 행동 교정치료를 하고 구질구질한 일들을 고생하며 낮은 보수에 만족하며 살다 부름을 받고 세상을 떠나게 되었습니다. 이 사람이 헨리 나우웬입니다. 왜 그러냐 왜 거기까지 낮아졌냐 물었을 때 몇 개월 동안 침묵했습니다. 그리고 예수의 이름이라는 책에서 답했습니다. 나는 지금까지 성공을 향해 꼭대기를 향해 오르막길만 추구했다. 그러나 성공과 칭찬에 가려 예수가 보이지 않았다. 낮은 곳에서 예수를 만날 것이다. 인생의 오르막 길에는 예수가 보이지 않는다.


고대 사회에서는 학교 1학년을 현자라고 불렀다고 합니다. 2학년을 철학자, 최종 학년 3학년을 비로서 학생이라 했다고 합니다. 배우려는 학생의 자세를 갖추는 데에 몇 년의 시간이 필요하다는 교훈입니다. 누가 진정한 리더입니까. 배우려는 자 입니다. 허리를 굽히는 자가 진정한 리더입니다. 낮은 자세로 먼저 발을 씻어주는 자가 정말 리더입니다. 요즘 보면 수많은 리더십에 대한 서적이 나옵니다. 상대를 누르고 오르막길로 가야하는 상황 속에서 어떻게 하면 공동체를 잘 이끌고 유지할 수 있을까 하는 고민 가운데 지도자됨에 관심 갖게 되는 것이죠. 그런데 요즘 책을 보면 새로운 대안적인 리더십의 공통점은 상호간 소통, 수평적 관계, 마지막으로 자발적 섬김입니다. 건강한 리더십이라는 것은 공동체가 가져야 할 리더됨은 자발적인 섬김이라는 것입니다. 놀라운 것은 어렵지 않게 예수님께 그것을 발견해왔습니다. 사람을 높이고 살려내는 리더십이었습니다.


지난 10개월동안 우리는 다양한 직분으로 뉴송 공동체를 섬겨왔습니다. 그 중 큰 감동을 받는 것 중 하나가 리더들이 저를 직접 찾아오거나 보고서를 통해 다급하게 간절히 부탁할 때 입니다. 우리 팀 우리 그룹에 누구가 몸이 아파서 예배 못 나왔습니다. 목사님께서 심방해주시면 힘이 날 것 같습니다. 앞에 잘 지내셨어요 하고 뭘 써요. 그리고 본론에 사실은 저희 그룹 누구가 이번 주에 시험이 있어요. 기도해주시면 더 잘 칠 것 같습니다. 그룹원을 팀원을 부서원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자기가 내려앉는 것입니다. 마태복음에 수로보니게 여인이 딸을 위해 발 앞에 엎드린 것처럼 간절한 마음으로 내려앉는 것입니다. 주변에서는 돌려보내려고 하지만 깊은 관심을 두시고 여자여 네 믿음이 크도다 네 소원대로 되리라. 주님께서는 내려 앉는 사람의 기도를 들으십니다. 당장 보이는 어떤 보상도 금띠도 없지만 수건을 두르고 발을 씻는 주님 닮은 리더들이 있기에 여기까지 달려왔습니다. 그랬기에 우리 기도가 응답될 줄 믿습니다. 지금의 아름답고 멋진 뉴송 공동체가 있는 줄 믿습니다. 그룹원이니까 마땅히 받을 바를 받아야 된다 그런건 없습니다. 그룹장이기 때문에 이것은 해야 한다 그런건 없습니다. 누구든 아니든 간에 여러분 우리는 누구든지 섬김의 본을 보여야합니다.


당시 유대 예법에는 식탁에 초대받으면 목욕을 하고 갔습니다. 가면 집 주인이나 종이 발만 씻어주면 되었습니다. 초대받은 집에 들어가기 위해 먼저 목욕으로 깨끗이 하는 것 처럼 교회 안에 들어오기 위해 몸과 정신을 깨끗케 하기 위해 세례를 받고 신앙공동체의 일원이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미 세레 받은 자는 걸어가면서 발에 묻은 먼지를 씻는 회개가 필요한 것입니다. 더러워진 발을 씻어서 주님의 식탁자리에 속함을 다시 확인하는 것이 발 씻음에 숨겨진 영적 의미입니다. 말씀처럼 베드로는 그 의미를 깨닫지 못했습니다. 회개의 의미를 깨닫지 못했습니다. 또 수건을 동이고 씻기심으로 사랑의 섬김을 실천하시는 뜻도 알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이후에 알게 될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베드로전서를 보면 그는 성도들에게 너흰 허리를 동이고 근심하여, 다 서로 겸손으로 허리를 동이라. 교만한 자를 대적하시되 겸손한 일꾼들에게는 은혜를 주신다. 이제 베드로는 그가 나서서 그가 섬기는 교인들을 향해서 수건을 허리에 동이는 것, 발을 씻음 속에 있는 겸손과 섬김의 은혜를 가르치는 것입니다.


여러분, 지난 10개월의 삶을 잠깐 돌아보시면 좋겠습니다. 섬김 받는 자였는가 섬기는 자였는가. 디아코니아의 의미는 식탁에서 시중드는 일입니다. 이 말에 그리스도인들이 주님과 교회를 위해 헌신하는 것, 나를 포기하는 것의 의미로 사용되었습니다. 여러분이 속한 공동체는 디아코니아 입니까. 나로 인해 디아코니아가 만들어지고 있습니까. 아니면 나로 인해 디아코니아가 이루어지지 않고 혹 다툼이 계속되고 있습니까.


섬기기 위해 구원받았다. 섬김을 모르는 삶은 구원을 모르는 삶입니다. 왜 나사로를 고치셨습니까. 그로 인해 복음의 증인이 되게 하시기 위함이었습니다. 우리가 회복된 것은 섬기기 위해서 입니다. 사회의 리더가 되시길 바랍니다. 이유는 섬기기 위해서 입니다. 칼바르트는 섬김의 삶은 자신의 계획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교회의 지시에 따라 살려는 행동이다. 우리 교회의 수많은 사역을 통해 선포되는 바 우리는 교회와 세상을 섬기기 위해 살아갑니다. 그렇게 반복해 말씀하시고 몸소 가르치시고 혹 기억하지 못할까봐 다시 명령하십니다. 이제 내가 너희에게 한 일을 알겠느냐. 내가 사실 주인이며 선생이나 너희 발을 씻겨주었으니 너희도 이렇게 하라고 내가 본을 보여준 것이다. 본이라고 번역된 헬라어는 아주 드물게 사용됩니다. 모범이라고 번역된 단어. 그런데 이 단어에 근거해서 요한의 교회가 세족식을 매일 매 예배에 정례화해서 시행했다는 말이 있습니다. 가르침을 되새긴 것입니다. 하나님의 집에서 종의 본을 서로 보이라는 뜻입니다. 오직 하나님만이 주인 되신 이 시간에서 나의 권리를 주장하지 않고 서로의 발을 씻어서 본을 보이라는 하나님의 뜻입니다.


주님 어떻게 저의 발을 씻습니까. 제 발은 옆 사람이 알아서 씻어줄 것입니다. 그건 이기주의 입니다. 제 발은 제가 알아서 할게요. 저 사람도 그렇습니다. 그것은 개인주의 입니다. 이 시대가 그렇듯 우리 공동체에서도 개인주의와 이기주의가 너무나도 가득 차 있습니다. 너희도 서로 씻어주는 것이 옳으니라. 너희 발을 씻어주는 것이 좋지 않겠니. 필요하면 씻어라. 이렇게 말씀하지 않으셨습니다. 명령하셨습니다. 좋은 것, 더 좋은 것의 선택의 문제가 아니라 선한 것 악한 것의 문제입니다. 안 씻기는 것은 악한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옳지 않은 일이다. 가정에서 교회에서 세상에서 이기주의 개인주의가 팽배함을 주님께서는 먼저 무릎 꿇으셔서 발을 씻어주셨습니다. 우리도 먼저 다른이들의 발을 씻어주라 하십니다.


나는 발을 씻어주는 사람이었는가 누군가가 씻어주었는가. 그리스도인이라고 믿으신다면 남은 2개월동안 발을 씻어주시길 바랍니다. 이것이 더 좋은 일이 아니라 옳은 일입니다. 그룹장에게 카톡을 먼저 받으셨다면 먼저 남기시길 바랍니다. 차단하셨다면 카톡 지우고 다시 까시길 바랍니다. 10개월정도 되면 나는 발을 씻어준 사람인가 씻어준 사람인가 돌아볼 때입니다. 남은 2개월을 부끄럽지 않게 발 씻어주는 사람으로 서시길 바랍니다. 시대는 그러면 바보라고 합니다. 씻어줄 시간도 없습니다. 하지만 끝까지 사랑하셨던 주님의 명령대로. 이것이 옳다.


슈바이쳐가 인생을 바꾼 부부가 있습니다. 래리 멜런이라는 사람은 알루미늄 생산 회사의 상속자인 재벌 2세입니다. 슈바이쳐의 기사를 읽었습니다. 당시 텍사스에서 거대한 목장을 경영하고 있었는데 그 기사를 읽고 슈바이쳐와 같은 질문을 던집니다. 나만 행복해도 되는가. 그리고 37세의 나이에 의사가 될 것을 결심하고 아내 그웬 멜런에게 말합니다. 아내 대답은 나도 목장에서 소 보는 것 지겨운데 이렇게 앉아있는 것 싫어요. 남편이 의학공부 하는 동안 먼저 아이티로 넘어가서 병원 세우는 것을 감독하기 시작합니다. 돈이 많으니 병원 세우는 데 썼던 것이죠. 그 남편이 공부를 마치고 난 후에 병원을 완공합니다. 알버트 슈바이쳐 병원을 개원합니다. 지역 공동체 원주민들의 이질과 장티푸스 예방에 힘씁니다. 18년동안 슈바이쳐와 여러 통의 편지로 경험과 노하우를 서로 나누고 전합니다. 비록 남편이 먼저 세상을 떠나지만 부인은 병원을 지키다 죽었습니다. 지금은 자녀와 손자들이 여전히 병원을 섬기고 있습니다. 지금의 섬김이 내일 또 다른 섬김을 낳는 것입니다.


여러분 그룹장의 섬김이 다음 그룹장을 세워지는 것 처럼. 여러분의 섬김이 또 다른 섬김을 낳는 것입니다. 우리 안에 섬김의 행동이 먼저 있기를 바랍니다. 어느 기자가 슈바이쳐에게 갑자기 병원을 세웠느냐 물었습니다. 그는 나는 도저히 말로 감동시킬 수 없었습니다. 말로 힘들다면 먼저 의자를 옮기면 됩니다. 먼저 기도하면 됩니다. 너희도 행하게 하여. 인생을 향한 끝까지의 사랑을 몸으로 보이신 주님을 닮은 우리 되길 부탁합니다. 우리도 행할 수 있습니다. 섬김과 행함으로 채우시길 바랍니다.

 

 

Posted by GaePein
etc/신앙생활2014. 10. 16. 19:54
10.16일(목) 새벽예배
• 갈라디아서 2:20

20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시는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자신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

이 새벽에도 주의 전을 찾으신 여러분에게 하나님이 크신 은혜를 주실 줄 믿습니다
당회장 목산님은 지금도 쉼없는 사역을 감당하고 계십니다
끝까지 기도해주시고 하나님께서 더 크게 채워주시는 은혜가 있기를 바랍니다
사람이 의식없이 무의식중에 하는 행동이 많이 있지만 제 아내는 휘파람을 잘 불어요
여자가 휘파람을 잘 불어서 뭐하겠느냐는 생각을 하시겠지만 휘파람으로 두곡을 잘 부르는데 그 하나가 애국가를 잘 부릅니다
설거지를 하면서 얼마나 즐겁게 부르는지 모릅니다
또 하나는 우리귀에 익숙한 남진의 님과 함께입니다
하루는 제가 물어봤어요
그 노래가 무슨 노래인지 아느냐?
애국가는 잘 알지만 남진 노래는 모른다는 거예요
집 사람이 어릴 때 이민가서 들어왔는데 많이 들어봤다는 거예요
그래서 사모가 가요를 부르면 되겠느냐 해서 곡을 찾아달라고 해서 찾아줬어요
그 가사를 보면 가사가 좋아요

저 푸른 초원위에 그림 같은 집을 짓고 사랑하는 우리 님과 한 백년 살고 싶네
봄에는 씨앗뿌려 여름이면 꽃이피고가을이면 풍년되어 겨울이면 행복하네

뒤에 좀 더 있지만 시편 23편의 말씀과 거의 버금가는 세상의 시편 23편이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우리가 잘 부르는 애창하는 복음성가 있잖아요
여호와 나의 목자 내게 부족함 없네
이것을 한번 맞춰서 불러 봤어요
그런데 음율이 딱 맞아 들어가는 거예요ㅎㅎ
시편 23편하고 거의 비슷한 수준이겠다 생각 했어요
주님의 십자가 안에서 해석을 해보니 이 노래 안에서 담고 있는 핵심은 아무리 어려워도 님과 함께 하면 부족함이 없다는 것입니다
우리 주님과 함께 하기만 하면 내가 힘겨워 보이는 이 상황과 어려움도 풀리지 않는 기도제목도 문제가 안되는 것입니다
언젠가는 때가 되면 해결되리라는 이믿음이 우리를 오늘도 견디게 해 주시고 이 세상에서 승리하는 삶을 살게 해주는 줄 믿습니다

동물의 왕국을 보면 밀림에서 가장 강한 동물에 대해서 여러가지 말이 있지만 코끼리라고 하는 분들도 있습니다
그러나 코끼리도 개미에게 당하는 것입니다
한마리는 별게 아니지만 수만마리가 모이면 순식간에 코끼리를 무너뜨리는 것입니다
밀림의 맹수들이들판의 수없이 많은 먹이들이 있지만 함께 모여 있는 무리는 놈은 공격을 하지 않습니다
그리고 그 곳에서 힘이 세다고 자랑하고 이탈되어 나오는 그 동물을 먹이로 삼는 것입니다
그것이 양이 되든 사슴이 되든 누가 되든 이탈되어 나오는 동물을 잡는 것입니다

기독교 역사에 산 증거가 되고 있는 카타콤베가 있습니다
그 안에서 어떻게 살 수 있을까 생각을 해봅니다
그들이 살 수 있었던 유일한 길은 십자가였습니다
예수그리스도였습니다
그리고 함께 사는 것입니다
나만 고난 당하는 것이 아니라 모두 함께 어려운 일을 감당하고 있기 때문에 언젠가는 시간이 되면 이 굴 밖으로 지상으로 나아가리라는 믿음이 있었어요
베트남에 가면 유사한 곳이 있습니다
사람 한 사람이 들어갈만한 통로가 있어요
그러나 그 안에는 집도 있고 사무실도 있고 기도실도 있고 모든 것이 갖춰져 있어요
그곳에서 마치 지상에서 살아가는 것처럼 살아가는 것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살아갑니다
그들이 베트남 전쟁에서 지지 않고 승리할 수 있었던 것이 바로 그거예요
그들이 협력하고 기다리고 연합하니 승리하는 날이 오는 것입니다
우리 기독교에도 협력하는 것에 대한 말씀이 많이 있습니다
한 사람이 수고함으로는 안되지만 두 사람이 같이 하면 되는 것입니다
나 혼자 걸어가다 보면 내가 넘어졌을 때 일으켜 줄 자가 없지만 함께 가면 일으켜 세워줄 수 있다는 것입니다

한 사람이 패하겠거니와 두 사람이면 맞설수 있거니 세겹줄이면 쉽게 끊어지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신학적으로도 마찬가지입니다
삼위일체의 신비함이 저와 여러분에게 보여주는 함께 해야함을 보여주는 증거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근본 자체가 연합을 실천하고 계시고 우리에게도 말씀하고 계십니다
한분이 따로따로 계신것처럼 한 몸이 되어서 우리에게 역사하고 계십니다
예수그리스도의 사역은 어떻습니까?
우리에게 찾아오셔서 행한 것은 무엇입니까?
화목입니다
우리가 협력하게 하시고 하나님을 의지하게 하시고 십자가를 의지함으로 이 땅에서의 생명뿐만 아니라 영원한 생명을 얻도록 도와주시는 것입니다
메사추세츠 메모리얼 병원에 아주 진귀한 일이 일어났습니다
쌍둥이가 조산을 하게 되었습니다
인큐베이터에 들어갈 수 밖에 없었습니다
슬프게도 첫째는 잘 자라게 되었는데 둘째는 심장이 나빠져서 1개월 후에는 심장이 정지할 정도로 안 좋아졌어요
의학적으로 어려운 상황이었어요
그런데 한 간호사가 결단을 합니다
따로따로 들어가 있는 이 쌍둥이를 함께 넣어놓는 것입니다
옛날에 그런 방법을 사용한 것을 생각하여 했는데 놀라운 일이 일어나는 것입니다
이 아이의 심장이 감쪽같이 정상을찾아오는 것입니다
거의 8~9개월 가까이를 함께 동거하던 아이들이 세상으로 나와서 따로 떨어져 있으니 한명은 약해져 갈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러나 함께 하니 그 아이의 능력이 전해졌습니다
지금은 두 아이가 잘 자라고 있다고 합니다

그 말못하는 두 영혼도 살아있는 살리고자 하는 소망이 있는 함께하니 살아나는 역사가 일어나는 것입니다
오늘도 살아나기 원하십니까?
주님 안에서 소생하기 원하십니까?
부활의 능력이 함께 하는 십자가와 함께 하시기를 바랍니다
선교학에서 중요한 이슈가 되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교회는 다른 사람을 위해서 존재한다고 생각했어요
맞는 말입니다
그러다 오늘 날에는 무엇이라 말을 하느냐하면 사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요구하시는 교회는 믿지 않는 자와 함께 하는 교회를 원하신다는 것입니다
누군가와 함께 한다는 것은 갑을의 관계, 주는자와 받는 자의 관계입니다
같은 마음으로 공유하고 공감하고 공생하고 공존하고 그래서 상생하며 함께 살아가는 것입니다
이 역사가 오늘 각 선교지에서 일어나고 있습니다
이 역사는 누군가를 위해서 일방적으로 주는 것에 익숙한 것보다는 그들을 포용하고 세워줄 수 있는 연합하는 마음, 한 마음이 되어 함께 살아갈 수 있는 마음을 가진 자들에게 함께 하는 것입니다

오늘 성경에서 정말 중요한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사도바울은 십자가 하나 밖에 없음을 강조합니다
갈라디아에 다른 복음을 가지고 들어온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예수님을 믿는 것 하난가지고는 안된다는 것입니다
할례를 받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오늘날에는 직분을 가진 사람이 우리에게 무거운 짐을 부과하는 경우가 있지 않습니까?
사도 바울이 마찬가지로 말을 합니다
내가 모든 것을 얻어보았고 행하여보았는데 나중에 시간을 지나고 보니 내가 예수님을 만나고 보니 그런 것들을 아무 소용이 없었습니다
이 세상의 명예, 권력, 시민권도 나에게 그어떤 것을 줄 수 없었습니다
내가 수없이 매를 맞고 굶어보고 도망다녀보고 해봤는데 나를 지켜준 능력은 이 세상에서는 찾을 수 없었고 십자가의 능력이 오늘까지 오게 한 것입니다
이 고백이 사도바울과 저에게 귀한 고백이 될 줄 믿습니다

우리는 오늘 무엇을 위해서 살아갑니까?
당회장 목사님께서 말씀하신 것처럼 오늘도 무엇을 얻을까 하는 인생이 아니라 나의 부족한 세상것을 채우기 위해서가 아닙니다
버리라는 것입니다
이 새벽에 와서 기도하는 모든 분들은 오늘 만큼은 버릴 수 있고 십자가와 함께 걸어갈 수 있도록 십자가의 능력을 세상 속에서 드러낼 수 있도록 기도하는것입니다
십자가는 우리를 어렵게 하는 두번다시 생각하기도 싫은 상징물이었습니다
그러나 그것이 3일이라는 누구에게는 짧은 시간이지만 누구에는 긴 시간으로 때가 되면 주님께서는 그것을 능력으로 바꾸어 주실 것입니다
내가 지금은 가시밭 길을 걸어가지만 하나님이 더 큰 은혜를 주셔서 이 가시가 내 삶의 촉진제가 되고 원동력이 되고 오늘도 십자가의 능력이 드러나는 귀한 약속의 하루가 되기를 바랍니다
우리가 기억해야 할 것은 주님 오늘도 십자가를 붙잡기를 원합니다
주님 이 십자가를 의지하고 행하는 하루가 되기를 원합니다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신 주님...
그러나 부활하신 주님을 바라보고 세상이 감당하지 못하는 믿음이 되기를 바랍니다
이 믿음, 이 소망이 저와 여러분에게 함께 하기를 바랍니다
이 시간이 다같이 기도하겠습니다

새벽을 깨웁시다^^

 

 

Posted by GaePein